白時瓚
1878-09-17 ~ 1947-03-13·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백시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계획이 착착 진행되자, 2월 28일 서울 인사동에 있는 중앙교회에서 이계창(李桂昌)은 박희도(朴熙道)·김창준(金昌俊) 등에게서 독립선언서 1백여매를 선천(宣川)지역의 책임자이며, 선천교회 목사인 그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그는 교인, 학생들을 동원하여 3월 1일 오후 1시, 선천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에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다시 선천서 폭파계획에 참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의 만주 관전현(寬甸縣)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을 암살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제1대는 서울, 제2대는 평양,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방면으로 파견되었으며,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 일행은 박치의(朴治毅)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선천경찰서 등의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을 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결사대원들이 다시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사람은 선천군청으로 가서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투탄하였으나 불발하였고, 박치의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선천경찰서로 가서 이학필은 밖에서 망을 보게 하고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였던 그를 비롯하여 20여명의 동지들이 동년 9월 7일까지 속속 체포되었으며, 그는 1921년 7월 2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3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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