范潤斗
1891-04-14 ~ 1958-05-10·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범윤두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라남도 광주(光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을 이용하여 김 강(金剛)·김 철(金鐵)·최병준(崔丙浚)·최한영(崔漢泳)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日本東京) 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거사 사실을 청년들에게 알려, 2·8독립선언서를 최한영·김복수(金福洙)등이 등사하여 두는 등 일찍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례(參禮)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서울의 만세시위를 목격했던 김 철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 귀향하여 이날 밤 남궁 혁(南宮赫)의 집에서 김 강·최병준·최한영·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奉)·한길상(韓吉祥)·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奎)·서정희(徐廷禧)·김태열(金泰烈)·홍승애(洪承愛)·손인식(孫仁植)·송흥진(宋興眞) 등과 만나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정황을 전하고,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참가 연락 등 사전준비를 분담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준비기일이 너무 짧아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거사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쇄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 등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만세시위를 계속할 때 일본헌병·경찰은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려 시위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시위군중이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출동하여 김 철 등의 주동자를 연행해 가는 것을 보고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일단 피신하였다가 제2 독립만세시위를 위하여 3월 17·18양일에 걸쳐 송정면 선암리(松汀面仙岩里)에 있는 박경주(朴京柱)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각 1천5백여매와 독립가(獨立歌) 5백여매를 등사하여 목포(木浦)등 인근 지역에 배포하는 등 계속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수배를 받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해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장기간에 걸쳐 고통스런 피신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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