卞又範
1898-10-24 ~ 1974-12-23·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변우범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의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연합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리(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피신한,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등에 의해 계획되었는데, 그는 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 등과 함께 연락을 취하면서, 4월 3일 인근 3개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동리에 연락을 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4월 3일 오전 9시, 양촌리 냇가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뒤,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한편 진동면에서도 자체적으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군중이 진전면으로부터 시위행진하여 오고 있던 대열과 합류하여 시위군중은 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경,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진동 헌병주재소에서 출동한 8명의 헌병·보조원과 30여명의 일본 재향군인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군과 맨주먹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오후 3시 응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마산(馬山)주둔 일본군 야포대대군의 야만적인 발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그는 주동자로 체포되어, 이듬해 10월 30일 경성(京城)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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