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英伯
(1878)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서영백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서영백은 경기도 강화 출신으로 1908년 음력 정월 경기도 강화군 일대에서 김태의의진(金泰宜義陣)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종신징역을 받았다. 강화도 지역 의병운동은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된 이후 본격화되었다. 1907년 8월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가 봉기한 뒤 강화지역의 의병운동은 섬에 남은 해산 군인들이 이어가는 가운데 1908년 봄이 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08년 봄이 되면서 강화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의병부대와 의병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이능곤(李能坤),지홍일(池洪一),김봉기(金鳳基 또는 金龍基) 등이다. 강화도의 의병들은 30~40명 안팎의 부대를 형성하고 익숙한 지형과 서해의 독특한 조수 변화를 활용, 배를 타고 다니며 황해도 평산(平山),배천(白川),연안(延安)과 강화도의 인근 섬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을 떨치던 이진룡,이근수,한정만 등과 협조체제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서영백은 1908년 음력 정월 의병장 김태의(金泰宜)의 부하로 들어가 의병 40여 명과 같이 병기를 휴대하고 강화군 내의 각 촌락을 다니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서영백 등은 음력 2월 강화군 북면 강호동(江湖洞) 이감찰(李監察)로부터 180원, 성치상(成致相)으로부터 170원, 장하동(長何洞)의 홍낙현(洪洛鉉)으로부터 170원 등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서영백은 1908년 9월 29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소위 내란죄(內亂罪)로 교수형을 받았고, 곧 상소하였으나 대심원(大審院)에서 기각되었다. 1909년 3월 11일 내각회의(內閣會議)에서 종신징역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