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道淵
(1844) ~ 미상·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손도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청하(淸河) 출신으로 1910년 3월 김상태의진(金相泰義陳)에 소속되어 경북 용궁(龍宮)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일본인을 처단하는 등의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었다. 김상태는 충북 영춘군(永春郡) 남천(南川) 출신으로 1896년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 이강년(李康秊)과 함께 참여하였다.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이강년과 함께 따라갔다가 3년 뒤 귀국하였다. 1905년 7월 충북 단양에서 정운경과 함께 창의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이 도창의대장에 추대되자 김상태는 중군장으로 참여하여 순흥·봉화·풍기·영춘·영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체포·순국한 뒤, 그 군사지휘권을 인계 받아 독자적으로 부대를 편성하였다. 1909년 3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는 등 1911년 6월까지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김상태부대는 소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가면서 각처에서 게릴라적인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최성천(崔聖天)과 연결하여 1910년 3월 26일 예천군 위라면 오천시장에서 일본인 산내은삼랑(山內銀三郞)을 처단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상태·정경태·최성천·윤국범 등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1910년 11월 25일부터 동년 12월 20일에 걸쳐 소위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김상태는 정경태 등과 함께 순흥의 연화동에서 소백산을 근거지로 부하 14명을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다. 1911년 6월 14일 순흥의 연화동에서 일본군 대위 편종겸이 거느린 토벌대의 야습을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단식·순국하였다. 손도연은 김상태의진에 소속되어 1910년 3월 26일 경북 용궁군 신하면(申下面) 서지동(棲芝洞)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었다. 그 후 안동분견소(安東分遣所)에서 취조를 받고 기소되었다. 소위 강도죄(强盜罪)로 기소되어 1910년 4월 18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았고, 이어서 공소하여 1910년 5월 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3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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