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膺龍
1920-05-05 ~ 2018-08-28·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손응룡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북 경성(鏡城) 사람이다. 1939년 3월 일본(日本)의 우도궁고등농림학교(宇都宮高等農林學校)에 입학한 후 동삼성(東三省)사람으로서 일본에 유학을 온 학생인 원길춘(宛吉春)과 친교하면서 일본을 비방하고 '삼민주의(三民主義)'·'내핍의 경제' 등 민족의식을 아양하면서 반일사상과 독립정신을 고무하는 서적을 탐독하고 장차 한중(韓中) 양국이 독립된 후 지도체제를 결성하는데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42년 3월 북해도대학(北海道大學)의 농학부(農學部)에 입학한 후 한국인학생회인 북우회(北友會)에 입회하여 이배함(李培咸)·임종묵(林種默)·손종원(孫宗源) 등과 함께 아래와 같은 독립운동활동을 하였다. 첫째, 일본의 국력이 전쟁으로 피폐해졌을 때 우리가 일제히 봉기하기 위하여 우선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각자가 학생징용자·일본교포·징용위안부들에게 민족의식의 앙양 및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둘째, 중국인 유학생들과의 친교를 돈독히 하면서 일본의 패전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한국독립지도체제와 후원방법을 협의하였다. 셋째, 이배함·이종묵과 함께 교포가정을 방문하여 그 자녀들에게 한글과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다. 넷째, 독일(獨逸)국민에게 고함, 한국 농업지대(韓國農業地帶)·삼민주의(三民主義)등의 도서를 탐독하고 평가하면서 독립방법을 연구하였다. 다섯째, 탄광이나 징용에 끌려간 노무자 및 각 도시에 산재해 있는 유흥업소의 부녀자를 계몽하는 방법을 협의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이에 1943년 3월 찰황헌병대(札幌憲兵隊)에 한국인 학생전원이 붙잡혀 1개월에 걸쳐 조사를 받고 찰황지방검찰정으로 송치되어 5개월간 재조사를 받았다. 그후 1944년 5월 12일 찰황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10월 7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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