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貞道
1881-07-26 ~ 1931-02-19·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손정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안남도 강서(江西) 사람이다.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滿洲) 일대에 파견되어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는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2년 하얼빈에서 소위 일본 수상 계태랑(桂太郞)의 주살모의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珍島)에 유배형을 받아 그곳에서 약 2년간 묶여 있다가 1914년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독립운동 시위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동년 4월 10일, 11일 양일간에 걸쳐 이동녕 등 동지 30여 명과 같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개최하였다. 회의는 간부 선출부터 구성해야 한다는 순서에 따라 의장에 이동녕(李東寧)을 뽑고 그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동 간사로 이광수(李光洙)·백남칠(白南七)을 선출한 뒤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 등을 선임하였으며 조소앙·이시영이 초안한 10개조의 헌장(憲章)과 정강(政綱)을 심의 통과시켜 4월 13일 임시정부가 내외에 선포되었다.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되었는데, 이 무렵에 서울에서 소집된 국민대회에서는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한성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서울에 체재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노오불에게 부탁하여 국내에서 모금된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전달받기도 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김 립(金立)·김 철(金徹)·김 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발표하였으며, 이 의용단의 단장에 임명된 김석황(金錫璜)은 동년 8월 평양경찰서와 평양시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의거에 참가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 3일에는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조상섭(趙尙燮)·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동년 8월에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에 당선되어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동년 8월에는 김 구·여운형 등 동지들과 함께 한국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에 뽑혀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3년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의 알력이 심해짐에 따라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하게 되었으며, 그는 이 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여 동년 2월에 재정위원에 선임되었으며, 홍 진(洪震)·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시키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 길림(吉林)으로 돌아가 기독교회(南監理派)를 조직하고 교회를 세워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 3월 1일에는 이곳에서 양기탁(梁起鐸)·왕삼덕(王三德)·최 일(崔日)·박기백(朴起白) 등 동지들과 기념식을 갖고 앞으로의 독립문제와 실력양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주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2월 고활신(高豁信)·오인화(吳仁華) 등의 초청으로 길림에서 민족운동문제를 협의하다가, 1931년 2월 19일 동양의원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2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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