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太俊
1911-04-08 ~ 1950-04-13·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孫大俊, 孫泰俊, 朴東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손태준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31년 경남 진주에서 진주농업학교 동맹휴교와 동교 내 항일 비밀결사 ‘동무회’에서 활동하였다. 진주농교 맹휴사건에 관계된 혐의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나, 2개월 여 동안 경계망을 피해 인근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신사상을 선전하였다. 1931년 4월 20일 천전리 야학교에서 순사를 넘어뜨리고 도주하였다가, 24일 새벽 함안에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손태준은 1931년 6월 5일 진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손태준은 출옥 후 1932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2년 9월 컵보우 성남반(城南班)에 가입, 기관지 『적기(赤旗)』의 배포를 맡아 동경시전(東京市電) 파업응원투쟁위원회에 참가하였으며, ‘하라쥬쿠[原宿] 『赤旗』 友의 會’를 조직하고, 일본공산당의 간부였던 이와타[岩田義道]가 고문으로 죽자, 노농장(勞農葬) 경비대를 편성하여 추도문을 작성하였으며, 노농장 실행위원회에 참가하여 삐라·격문을 살포하였다. 1933년 1월 조응구(趙應龜)의 권유로 일본공산당에 입당, 동경서남지구위원회 제5군 실업자세포에 소속, 세포의회에 참가, 『적기』 배포의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다가 1933년 2월 13일 체포되었으나, 5월 10일 기소유예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08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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