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國浩
1900-12-10 ~ 1924-10-10·일제강점기
이명·자·호 申景浩, 申國洪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신국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라남도 장성(長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3∼4일에 걸쳐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北二面茅峴里)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4월 3일 저녁 아버지 신경식(申耕植)과 고용석(高龍錫)·유상순(柳相淳)·유상설(柳相卨)·정병모(鄭秉謨) 등이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시국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다가 귀가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사가리(四街里)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신경식·정병모·신태식(申台植)·신상우(申商雨) 등과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박광우(朴光又)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니,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 분대를 불러들여 합세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고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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