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瑛澈
1917-08-05 ~ 미상·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신영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36년 이홍래(李鴻來) 등과 함께 비밀결사 무명(無名)그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38년 9월 춘천고등보통학교(春川高等普通學校)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5년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부터 이홍래·박우홍(朴禹弘)·이종식(李鍾植) 등과 조선독립의 실행 방안을 강구한 끝에, 주의를 같이 하는 동지를 획득하고 이들과 함께 귀농하여 농민운동에 종사함으로써 민족주의를 고취시킬 목적에서 비밀결사 무명그룹을 조직하였다. 1937년 9월 다시 이종식 등과 회합하여 조선 고유의 문화를 연구하자고 제안하며 동의를 얻은 뒤 실행방안을 협의하였다. 1938년 3월 회합에서 신영철은 농민지도 방안을 제시하고,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역설하면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발행하는 <한글>을 구독할 것을 제안하여 찬동을 얻어 실행 방안을 협의하였다. 1938년 9월 24일 무명그룹 회원들과 함께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국내외 정세의 동향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신영철은 「조선의 형상」이라 제목 아래 약 20분간에 걸쳐 "우리들의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우리가 민족문화의 재건을 꾀하는 데 있다"는 뜻을 역설하였다. 1938년 10월 춘천서(春川署)에 검거된 뒤, 1939년 4월 19일 송치되었으며, 1940년 1월 17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 200일 통산) 집형유예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2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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