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寧鶴
1879-10-10 ~ 1933-11-02·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신영학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30년 12월 충남 논산군(論山郡) 두마면(豆磨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 12월 1일 신풍식(申豊植)ㆍ유무순(兪武順) 등과 함께 논산군 두마면 용동리(龍洞里)의 계룡산(鷄龍山) 중턱 백옥성(白玉聲)의 집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만세시위에 사용할 종이 깃발 4개, 종이 관(紙冠) 2개를 제작하였다. 종이 깃발 중 1개에는 '개궐후사신전(開闕後四神前) 수명포덕(受命布德) 지상천하(地上天下) 천불오만년(千佛五萬年) 명정(明定)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고 쓰고, 다른 1개에는 '중앙황제대장군(中央皇帝大將軍) 삼국대장(三國大將) 신영학'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신풍식은 만세시위 때 사용할 밤나무 봉(棒) 1개와 장(杖) 2개를 만들었다. 1930년 12월 3일 정오경 동지들과 함께 제작한 깃발과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부남리(夫南里)로 가서 조성한(趙珹漢)의 집 앞 도로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그의 셋째 딸 신윤성(愼閏成)도 깃발을 들고 참여하였다. 이어서 신도안 시장으로 가서 장날에 나온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신도안 경찰관주재소로 향해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신도안 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하여 순사 가토(加藤順郞)에게 "이곳은 조선의 토지이니 일본인 순사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살해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가토와 김갑준(金甲俊)이 이를 제지하며 체포하려고 하자, 가지고 있던 몽둥이와 돌로 두 순사를 구타하면서 격투 끝에 결국 체포되었다. 1931년 1월 22일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 강경지청(江景支廳)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 협박 및 상해죄로 징역 1년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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