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在鳳
1861-01-05 ~ 1907-09-12·조선
이명·자·호 申君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신재봉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연백(延白) 출신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발생 소식에 접하고 원수를 갚고자 연안지방의 유지 유치경(兪致慶)·평산(平山) 신석원(申錫元)·변석현(邊錫玄)·채홍두(蔡洪斗)·신혁희(申赫熙)·조종익(趙鍾益)·우종하(禹鍾夏)·채상열(蔡相烈)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으로 거사계획을 확정짓기 전에 제천 의진이 결성되어 크게 활약하고 있으며, 당대의 거유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신재봉은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의암 의진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정미7조약에 이어 한국군이 해산되자 더 이상 민족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신재봉은 을미 의병운동에 함께 참여하였던 제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유림계의 채홍두·변석현·정광철(鄭光轍)·박양섭(朴陽燮)·신 석(申석)·우병열(禹炳烈)·박시재(朴時載)·정형교(鄭亨敎)·오목영(吳穆泳)·채홍구(蔡洪九)·신필수(申弼秀)·조도환(曺道煥)·오식영(吳植英) 등과 의논한 후 전 목천부사(木川府使) 박기섭(朴箕燮)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신재봉은 소모장(召募將)에 임명되었다. 그는 평산으로 가서 도평산(桃坪山)에 의진을 정하고 박정빈(朴正彬)·이진용(李鎭龍)·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창의의 기치를 걸고 소모활동을 하는 한편 각 지방에 격문(檄文)을 살포하여 장정 4천여 명을 모았다. 9월 재령(載寧) 지방에 가서 의병을 소모하여 활약하다가 적군에게 체포되었다. 적의 압력에 끝까지 대항하며 적군을 매도(罵倒)하고 대의를 취하다가 1907년 9월 12일 마침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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