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萬伊
1895-08-28 ~ 1934-05-01·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安鍾鳴, 安應三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안만이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점당하자, 1916년 11월까지 경북 상주군 향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동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활동 중 체포되어 1921년 1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1년 9월부터 1922년 3월까지 6개월 간 고향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지규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3월에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참의부(參議府)에 가입하여 1925년 2월까지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한 참의부의 주요 간부로는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 박응백(朴應伯), 중앙의회 의장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 김소하 등을 들 수 있다. 1925년 2월 귀향하여 동년 3월까지 20일간 향리에서 활동한 이후 다시 만주로 망명, 이번에는 북만주로 가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했다. 신민부에서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활동 중 체포되어, 1926년 8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화폐·지폐·은행권·증권의 위조·변조·모조권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부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한국독립군에서는 이청천(李靑天, 총사령관)·남대관(南大觀, 부사령관)·신숙(申肅, 참모관)·이광운(李光雲, 의용군 훈련대장)·오광선(吳光善, 의용군 중대장)·이춘정(李春正, 의용군 소대장)·이우정(李禹正, 암살대대장)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독립군에서는 일제에 대항하여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군과 연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에서는 1932년 5월 3일 안만이와 조경한(趙擎韓)·이규보(李圭輔) 등을 아성현(阿城縣) 영발둔(永發屯)에 있는 중국군 고봉림(考鳳林) 부대에 파견하여 고봉림 등과 함께 한중 합작문제를 의논한 결과 일을 성사시켰다. 1932년 9월에는 반길군고봉림군(反吉軍考鳳林軍)에 참여하여 반만항일전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제1차 쌍성보(雙城堡)전투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동년 12월 하얼빈 총영사관 경찰서에 조영원(趙永元)과 함께 체포되어 신의주에 호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 후 석방되어 1934년 1월부터 동년 4월까지 독립군 사령부에서 가료 중 병세가 악화되어 귀가, 동년 4월부터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동년 5월 1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