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承樂
1913-04-01 ~ 1943-08-06·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周鎬, 裵申述, 安角, 李閔, 安龍燮, 安甲述, 安昌道, 安田, 安淸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안승락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안승락은 1928년 경남 창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사립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부친 안병현(安秉鉉, 安浚)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사회주의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재학 중에도 사회주의 사상가와 교유하며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 후 병을 얻어 귀향하였다가 1930년 9월 상경하여 중앙기독교청년회 학교 제1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사상사건에 연루 검거되어 퇴학당하였다. 여러 번 서울과 고향을 왕래한 후, 1932년 ‘적위대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 후 서울 동대문지역 적색노동조합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10월경부터 약1개월 여간 서울에서 ‘공산당재건 경성준비 그룹’을 지도하던 이재유(李載裕)와 여러 차례 만나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사 및 그에 대한 비판,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코민테른과의 관계, 운동통일의 방법, 공장 내의 조직 방법 등에 대해 토론하는 한편,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방법으로 철공장에 취직하여 활동하였다. 이재유의 지휘 아래 동대문·용산 지역을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4월 하순부터 동년 5월 10일 경까지 사회주의자 권영태(權榮台)를 만났고, 10월 경, 김윤생(金潤生)의 소개로 알게 된 김희성(金熙星)을 동부 이와무라(岩村) 제사공장에 직공으로 잠입시켜 1935년 1월 하순까지 수십 차례 만나 공장 내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김희성에게 이병희(李丙禧), 홍순형(洪淳逈)을 소개하고 함께 동지 규합 및 공장에서의 활동 방침 등 사회주의 운동을 하도록 하였다. 1935년 4월경, 서울 유해길 집에서 박인선(朴仁善)을 만나 자신이 속한 국제노선인 ‘콤그룹’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또한 이때 동지들의 아지트로서 다옥정(茶屋町) 부근에 단독 주택을 구입해 유해길에게 맡기고, 백명흠(白明欽)으로부터 운동 자금 700원을 받았고, 6월 하순에는 백명흠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사용하였다. 1935년 5월 이후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 종로구 중앙의원에서 회계와 수금을 담당하였다. 9월 상순경, 중앙의원에서 안창대(安昌大)·강탄구(姜彈求)·박인선과 만나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할 때까지의 준비를 자신을 중심으로 협의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0월,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안승락은 12월 1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2월 26일 법원 예심에 회부하였다. 19개월 여의 예심을 거쳐 1937년 7월 10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 250일 통산)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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