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鍾奭
생몰년 미상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안종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08년부터 1919년까지 성명회(聲明會)를 비롯하여 공교회(孔敎會), 창의소(彰義所) 등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안종석은 1908년 음(陰) 4월경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성명회에 가입하여 총재 유인석(柳麟錫)의 명으로 1910년 음 8월 일본관헌의 실정 등을 정탐할 목적으로 국내의 원산(元山)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성명회는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1910년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중심 인물들인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성명회는 국망을 당한 한민족의 울분과 독립의 비장한 결의를 담은 취지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정부에는 국제공약의 배신을 맹렬히 규탄하는 성토문(聲討文)을 보내고, 열강의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안종석은 1914년 음력 정월 경에는 간도(間島) 국자가(局子街)에서 공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성명회원 이성림(李聲林) 등을 만나 국권회복의 방안에 대하여 밀의하였다. 1915년 음 7월 길림성(吉林省) 동녕현(東寧縣)의 민배식(閔培植) 등과 창의소를 설치하여 사령관(司令官)을 지냈고, 동년(同年) 음(陰) 10월 부하 70명을 거느리고 두만강 부근으로 전진하다 러시아 기병(騎兵)과 격전한 일도 있었다. 안종석은 1916년 2월 중국관헌에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4월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1919년에는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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