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昌一
(1867) ~ 1931-08-20·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안창일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20년 평남 숙천향교의 유사(有司)를 지내면서 유림을 지휘하고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조국독립운동을 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 등이 중심이 되어 1919년 4월, 중국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되었고 1920년 4월 이후 국내의 각 도에 지단을 설치하고 각지의 청년회와 협력하여 조국독립을 꾀하였다. 안창일은 1920년 6월 김기한(金起漢)의 권유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평안남도 총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발영(李發永)을 자기 집에 묵게 하고 지단 조직에 관한 행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또 8월경, 평원군 유향계(儒鄕稧) 계장 김윤기(金潤起) 집에서 영유군 지단을 조직하여 김진오(金鎭五)를 지단장, 김찬정(金瓚楨)을 총무감, 이치로(李治魯)를 소모장(召募長)으로 한다는 사령서를 작성, 김윤기의 동생 김동기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평남 독립단 간부 이발영이 9월 3일 평남 경찰부에 체포되고, 이어 안창일 또한 평원경찰서에 붙잡혔다. 9월 19일 취조를 마치고, 검사국에 송치되어 7개월 동안 신문을 받았다. 1921년 3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1921년 4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수년 동안을 신장염으로 고생하다가 1931년 8월 20일에 평원군 검산면 용포리 자택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8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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