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芳梅
1890-08-18 ~ 1986-11-15·현대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양방매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후기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姜武景)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에는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영암군 금정면(金井面)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에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하였다. 양덕관은 양방매의 친아버지였고 큰 오빠였던 양성일(梁成一)도 20세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영암을 떠나게 된 강무경이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무경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이듬해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양방매는 남편부대의 일원으로 장흥(長興)·보성(寶城)·강진(康津)·해남(海南)·광양(光陽)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이 남평(南平) 월교리(月橋里)에 머물다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계획을 세운 다음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5개 부대로 나눈 후 대치(大峙)·대항봉(大巷峰)·월임치(月任峙)·덕룡산(德龍山)·병암치(屛岩峙) 등지에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본 군경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 남평의 거성동(巨聲洞)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여기에 직접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제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호남의병에 대해 파상적 탄압을 가해오자 10월 9일 강무경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강무경은 1910년 10월 4일 심남일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고, 양방매는 어린 여성의 몸이었기에 석방될 수 있었다. 정부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05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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