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一東
1912-12-30 ~ 1980-04-01·현대
이명·자·호 梁一童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양일동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옥구(沃溝) 사람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재학중이던 그는 이에 호응하여 동정시위를 주도하다가 퇴학당하였다. 1930년 3월 오재덕(吳在德)·이영욱(李永昱)과 함께 중국 북경(北京)으로 건너가 백정기(白貞基)·정내동(丁來東) 등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에 공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31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동년 4월 한하연(韓何然)·최낙종(崔洛鍾)·정찬진(丁贊鎭) 등의 동지와 함께 흑우연맹(黑友聯盟)이 주관하는 〈흑색신문(黑色新聞)〉의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어 무정부주의 사상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으며, 1932년 9월 동경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조선동흥노동동맹(朝鮮東興勞動同盟)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그는 오우영(吳宇永)·이윤희(李允熙) 등 재일본 무정부주의 단체의 대표들과 연합하여 반(反)파쇼·반제(反帝)·반실업(反失業) 등을 투쟁 목표로 선정하고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34년에는 중국 상해(上海)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유자명(柳子明)·정화암(鄭華岩) 등에게 〈흑색신문〉,≪토민(土民)≫,≪무궤도열차(無軌道列車)≫ 등의 출판물을 우송하며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였고 유길공사처단미수사건(有吉公使處斷未遂事件)으로 백정기·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등이 일본에 압송되자 이들의 구호활동에 힘썼다. 또한 그는 조선동흥노동동맹의 기관지인 〈뉴우스〉의 발행인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1935년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30원의 벌금형을 받았으며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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