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甸伯
1869-03-10 ~ 1933-01-1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양전백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26세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 예수교 장로회 전도사가 되었고, 1907년(융희 1)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에서 성직자 생활을 하였다.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와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를 설립하고, 1911년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14년에 예수교 장로회 총회 부회장이 되었다가 1916년 총회장이 되었다. 1919년 2월 12일에는 동지규합을 위해 선천에 왔던 이승훈(李昇薰)을 자기의 집에서 만나 이명룡(李明龍)·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 등과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는 이명룡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키로 약속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기 위해 자신의 인장을 함태영(咸台永)에게 보관케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동지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전도사업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2
대통령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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