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太鎔
1893-02-24 ~ 1937-11-15·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梁泰鎔, 梁大溶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양태용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부산(釜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 경남 동래군 구포(龜浦)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 구포면서기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平壤)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27, 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李守蓮) 등의 집에서 동지들이 회의를 거듭한 끝에, 구포 장날인 3월 29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소형 태극기 수백매씩을 제작하였고,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프랑카드를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그들은 구포장터에서 1,000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때 양태용은 솔선하여 선두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주도해 갔다. 계속하여 오후 3시 경, 양태용을 비롯한 시위군중 1,200여 명은 더욱 기세를 높이며,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그들은 주먹과 몽둥이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또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렇듯 시위군중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변하자, 일경들은 총탄을 쏘며 이들을 해산시켰다. 양태용은 이 일로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7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