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炳浩
미상 ~ 1919-04-07·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오병호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신천군의 3ㆍ1운동은 전국적인 시위운동의 전개양상과 보조를 같이 하며 1919년 3∼4월 중 군내 각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천군의 시위운동은 인근의 문화면(文化面)에서 처음으로 발화되어 전군으로 확산되었다. 곧 3월 27일에는 신천읍에서도 만세의 함성이 터졌다. 기독교인과 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준비가 진행된 후 주모자들이 27일 무정리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장꾼들이 합세하였다. 마침 장터에 나와있던 군수 장유(張裕)도 감격에 겨워 만세시위에 동참하게 되었으니 온 읍민의 독립을 위한 염원은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지하는 일경의 발표로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군중은 해산하고 말았다. 만세시위는 4월에 들어서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4월 6일 신천장날의 시위에 이어 4월 7일에는 읍내를 위시하여 용문면(龍門面) 사창리, 용진면 유천리, 북부면(北部面) 석당리 등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크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각지의 시위에 대해 일경은 실탄사격을 가함으로써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나 시위의 불길은 식을 줄을 몰랐다, 3∼4월 중 일경의 총격으로 인해 시위대에서 17명의 사망자와 9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오병호도 이와 같은 신천군의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의 총격으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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