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尙涉
미상 ~ (1919-03)·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오상섭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북 구성군(龜城郡)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구성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일부터 일어났다. 11일 오후 2시경 구성군 남시(南市)에서 군중 4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들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잡힌 자가 15명이나 되었다. 그 뒤 3월 30일에도 오전과 정오 2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한 3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 군중이 읍내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때 경찰과 충돌하여 몇 명의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면서 시위 군중은 해산하였다. 그 다음 날인 3월 31일은 남시 장날이었다. 이날 정오를 기하여 5,000여 명의 군중이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전날 사망자가 발생한 탓에 이날 군중들은 헌병주재소를 포위하면서 헌병들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헌병의 발포로 이날도 사상자 7명과 피검자 5명이 발생하였다. 한편, 같은 날 신시(新市)에서도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날 정오 신시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다 헌병주재소로 몰려갔으나, 역시 헌병들의 총격으로 부상자 1명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시위투쟁은 4월 1일에도 계속되었다. 1일에는 읍내,남시,신시 3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읍내에서는 오전 10시경 9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일본 헌병과 군대까지 합세하여 이를 제지 해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시위 군중들은 투쟁을 계속하여 오후 5시경 부상자 3명을 내고 해산하였다. 남시에서는 전날에 이어 투쟁을 재개하였다가 강제 해산되었고, 신시에서는 오전 10경 1,500여 명 이상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재개하였다가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 5명, 피검자 30명이 발생하였다. 이 시위투쟁 과정에서 오상섭은 일본 군경들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