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義善
1889-12-08 ~ 1931-05-06·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오의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이다. 1919년 2월 명치대학(明治大學)에 재학 중 2 8독립선언이 있자 임정에 투신할 것을 결정하고 상해로 갔다. 동년 4월 13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의정원 경기도 대표 신석우(申錫雨) 등 4명과 같이 초대 의원이 되어 입법활동을 통하여 임정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임시의정원법에 의해 손정도(孫貞道)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뽑고 나서 그는 홍 진 등과 같이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이춘숙 등과 같이 의정원 세칙제정위원회 위원으로 각기 선출되어 입법부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같은 해 6월에 제5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각 상임위원회(모두 9개 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그는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어 이사 유정근(兪政根) 위원 백남규(白南奎)와 함께 재정문제 해결을 위하여 고심하였다. 특히 1919년 5월 2일 제4회 회의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장이 재정문제 타결을 위한 의견을 타진할 때 그는 대표의원 홍 진(洪鎭;震) 김동형(金東瀅) 박용각(朴容珏) 장도정(張道政) 이원익(李元益) 손두환(孫斗煥) 조 정(趙檉) 등과 같이 내외 공채(公債)의 발부, 의연금 수합, 세금의 징수 등을 그 주요 재원으로 확보, 운영케 하되, 불복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강제규정을 두자고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1919년 7월에 조직된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 최윤동이 북경에서 박용만(朴容萬)의 부하 김 복(金復)과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 주식모집을 빙자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그는 그 방법 등을 계획하여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경북 안동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최윤동(崔胤東)이 일본 경찰 갑비(甲斐)를 총살한 의거활동의 관계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이후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時代日報) 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직접 군자금을 모집하였다고 하며,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공산당 "모플"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동년 5월 6일 옥중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0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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