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日成
미상 ~ 1908-02-21·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오일성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의병진의 도영장(都領將)으로 함남 영흥(永興)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친일주구배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지향하여 갔다. 오일성은 이러한 시기에 일본군을 축출할 목적을 가지고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도영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8년 2월 21일 함남 영흥군 하신리(下新里) 남방 요덕천(耀德川) 부근의 고지에 설보(雪堡)를 구축하고 10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활동하던 중 일본헌병 영흥분견대와 영원(寧遠)분견대에 발각되자, 이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2명의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헌병 분견대는 오장(伍長) 대하원(大河原) 등으로 후방을 맡게 하고, 상등병 관산(館山) 이하 7명을 전진시켜 의병들을 공격하여 의병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즉 이 전투에서 부장(副將) 김영준(金永俊) 등 26명이 전사하였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때 그는 동료 의병 6명과 함께 부상을 입고 붙잡혔으나 일본군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