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春伯
(1881)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왕춘백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함남 원산(元山) 사람이다. 민긍호(閔肯鎬)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충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민긍호는 서울 출신으로 1897년 진위대로 입대하여 원주(原州)진위대의 고성(高城)분견대, 춘천(春川)분견대 등을 거쳐 1902년부터 원주진위대의 특무 정교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킨 일제는 이어 지방의 진위대 해산에 나섰다. 그리하여 8월 5일 원주진위대를 강제 해산하려 하자, 민긍호는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300여 명의 진위대 병사들을 이끌고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선 그는 진위대 병사들을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를 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이후에는 의진을 소부대 단위로 편성하여 유격전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민긍호 의병부대는 소부대 단위로 산개와 집결을 거듭하면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강원·충청·경기도 일대에서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왕춘백은 이같은 민긍호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그는 1907년 음력 7∼8월 사이에 민긍호 의병부대에 속하여 동료 의병 300여 명과 함께 충북 충주(忠州), 강원도 원주·황성(橫城)군 소재의 마을에서 군자금품 수합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특히 1909년 9월부터 10일까지 전개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의해 의병전쟁이 쇠퇴하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까지도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금지철(琴地哲)·이용석(李龍錫) 등 동료 의병과 함께 1911년 1월 2일 강원도 횡성군 고모곡(古毛谷) 이십곡리(二十谷里)에서 군자금을 징수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1년 2월 20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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