禹炳烈
1856-08-30 ~ 1929-07-20·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우병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황해도 평산(平山) 사람이다. 1907년 평산에서 기의한 박기섭(朴箕燮) 의병부대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을미사변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인 평산으로 낙향하여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07년 군대해산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사위인 이진룡(李鎭龍) 의병장과 함께 의병 기의의 뜻을 굳혀 나갔다. 이들은 조맹선(趙盟善)·신준빈(申俊彬)·신정희(申貞熙)·한정만(韓貞萬) 등과 함께 동지들을 규합한 뒤 박기섭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우병렬은 중군장을 맡았다. 이때 사위인 이진룡은 선봉장을 맡았다. 장인과 사위가 의병부대의 선봉장과 중군장을 맡은 것이었다. 이 평산의진은 중군장·돌격장·유격장, 그리고 7개 부대의 중대장들이 각기 소부대를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유생들의 지휘하에 농민·포수·해산군인 등 수천 명의 군사들이 황해도 각지에 분산되어 일본군과 그 침략기관을 처단 공격하는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거센 공세속에서 의병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우병렬과 이진룡은 해외에서 재기를 도모하고자 1911년 10월 의병의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그는 의병의 재기 계획이 뜻과 같지 않았고 더욱이 중국의 변발( 髮) 강요가 심해지자 귀국하여 향리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6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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