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道常
1848-01-01 ~ 1946-05-04·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원도상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북 단양(丹陽)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의 수성장(守城將)을 하였고,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영춘군(永春郡) 총독(總督)으로 활약하였다. 원도상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토역복수(討逆復讐)를 목적으로 유인석 의진에 참가하게 되었다. 유인석 의병진은 봉기 이후 영월(寧越)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고, 유인석이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호좌창의군(湖左倡義軍)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단양(丹陽)·풍기(豊基)·영월(寧越) 등지에서 전과를 올려 의병진영은 날로 번성해 전성기에는 1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인석 의진은 1896년 2월 17일 충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일본군과 15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국 의병진들이 충주성을 포기하게 되었고, 3월 8일 제천으로 다시 돌아와서 유진하게 되었다. 이에 유인석 대장은 안승우(安承禹)를 중군장(中軍將)에 임명하는 한편, 원도상으로 수성장(守城將)을 삼았으며, 홍대석(洪大錫)으로 전군장(前軍將)을 삼고, 청풍의 북창진(北滄津)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신지수(申芝秀)로 충주 강령(江嶺)의 좁은 목을 지키며, 장익환(張益煥)으로 단양 경계를, 이형구(李亨九)로 개천(開川)의 좁은 목을, 김교헌(金敎憲)으로 원주목을 지키는 등 각처의 파수를 엄히 하였다. 이로 인해 충주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유인석 의진은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을미의병이 종결되자 원도상도 향리인 영춘(永春)에 잠적하여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우리의 국권을 피탈하더니,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강제하여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여 갔고, 특히 그것은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중부지방에서는 을미의병 때 문경에서 안동부 관찰사를 처단하면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던 이강년이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仙) 등 유능한 해산군인과 합류하여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이에 원도상도 이강년 부대에 합류하여 영춘군 총독(總督) 및 좌종사(坐從事)로 재기하였다. 그는 이강년 의진에서 주로 부대의 군수품과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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