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命寔
1893-09-13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유명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성진군의 만세시위는 3월 10일 오전 10시 제동병원 광장에서 욱정교회(旭町敎會) 교인들을 비롯한 군중 5,000여 명이 운집하면서 시작되었다.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시위군중들은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오후 3시 반경 기독교에서 경영하는 보신학교(普信學校) 학생 약 40여 명은 일본인 상가·경찰서·우체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기독교인 약 200여 명도 학생들의 시위에 가담하였다. 성진 읍내의 시위는 곧 북부 해안의 학동면으로 파급되었다. 3월 11일 김학천(金學天) 등 천도교인 3명은 방동(防洞)에 사는 강도희(姜道熙)를 찾아갔다. 그들은 강도희를 통해 유지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에게 전국 각지의 시위상황을 보도한 『매일신보』와 면서기인 유명식이 면사무소에서 등사한 『독립신문』과 안변의 「독립선언서」를 토대로 하여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여기에 참석하였던 유명식·김홍종(金洪鍾)·허채(許採) 등 30여 명은 11일 밤 방동 면사무소 부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3월 14일 밤에는 학동면 하천(荷川)에서 유명식·김홍종·허채 등이 동민 200여 명을 이끌고 인근 산 위에 올라가 징과 북을 치면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밤늦도록 시위를 계속하자, 하천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성진경찰대의 지원을 얻어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처럼 유명식은 1919년 3월 11일 학동면의 만세시위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고,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5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7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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