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秉淇
1882-05-03 ~ 1910-05-30·대한제국
이명·자·호 劉元執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유병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유병기는 전라남도 구례(求禮)의 양반가문 출신으로서 일찍이 유학에 입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고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전략이 노골화 되어가자 이에 대한 적극 저지 투쟁을 전개하고자 결심하였다. 1907년 5월경 사사하는 충남 은진(恩津)의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을 찾아가 거의할 것에 대한 의논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전주(全州)의 간재 전 우(艮齋 田愚), 광주(光州)의 송사 기우만(奇宇萬), 거창(居昌)의 우담 곽종석(宇潭 郭鍾錫) 등을 찾아가 상의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유병기는 다시 전남북의 담양·장성·함평·정읍·무주 등 20여 군수를 찾아가 설복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김 준(金準, 金泰元)·김 율(金律)·백낙구(白樂九)·조기영(曺基榮)과 더불어 거의하여 김 준을 상장으로, 김 율을 중군장으로, 백낙구를 후군장으로, 조기영을 기포장(起砲將)으로 삼아 의진을 구성하고 자신은 총지휘자가 되었다. 기병 당시의 의병 수는 약 7백 명, 총기는 약 5백 정을 휴대하였다. 군수품은 한 장의 통문으로 능히 조달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의 신망도 두터웠다. 이같이 하여 유병기 의진은 함평군 나산(羅山)을 거점으로 담양·영광·장성·창평·광주·동복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9월 중순 흥덕군 사진포(沙津浦)에 있던 일본인의 가옥 3동을 소각하였으며, 11월에 함평 읍내 일인 가옥 3동을 다시 소각하였다. 12월 동복 신평(新坪)에서 일군과 접전하여 적 3명을 사살하였으며, 1908년 2월 2일 창평군 무등촌(無等村)에서 적과 교전하여 일군 수명을 사살하고, 쌍안경 1개·단총 1개·군도 1자루를 노획하였다. 2월 21일 장성군 남이리(南二里)에서 적과 교전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본인도 오른쪽 팔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다시 나주군 도치(島峙)에서 적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3월 14일 영광군 봉산면(奉山面)에서 적과 접전하여 일군 기병 중위 관정(管井) 외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3월 나주군 용진산(龍津山)에서 적과 격전을 벌여 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4월 중순 순창 산막에서 적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접전 중에 후군장 백낙구가 전사하였다. 5월 30일 창평 용흥사(龍興寺)에서 적과 접전하여 크게 참패하였다. 이때 기포장 조기영이 전사하고, 유병기는 왼쪽 팔과 왼편 복부에 다시 총상을 입었다. 총상을 입은 후 치병에 힘쓰다가 후에 다시 양상기(梁相基) 의진의 참모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양상기와의 견해 차이로 의진을 탈퇴하였다. 그후 재거를 꾀하던 중 적에게 체포되어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1910년 5월에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77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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