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如大
1878-11-26 ~ 1937-01-13·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유여대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00년(광무 4) 의주에 양실학교(養實學校)를 창설한 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전도사(傳道師)로서 송장면 교회(松長面敎會)·수신면 교호(水鎭面敎會)를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하다가, 1909년(융희 3)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했다. 졸업 후 목사로서 의주 동교회(義州東敎會)를 맡아보면서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국제정세를 살피며 독립의 기회를 엿보던 중, 1919년 2월 10일 평안북도 선천(宣川) 천북동(川北洞)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이인환(李寅煥)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자신도 민족대표자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키로 하고, 그는 의주 방면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하여 고향에서 동지를 포섭하였다. 그러던 중 2월 27일 정주(定州)에 있는 덕흥교회(德興敎會)의 조형균(趙衡均)으로부터 서울에서는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을 선언하며, 각 지방에도 미리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니 이를 본받아서 의주에서도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만세를 일으키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줄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유여대는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의주의 홍서동(弘西洞)에 약 7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찬송가를 부르고 조선독립의 기도를 올린 뒤, 서울로부터 체송된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삼창하다가, 출동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의주 동교회(東敎會) 목사로 시무하면서, 3·1운동 당시 폐쇄되었던 양실학교(養實學校) 재건을 위해 기부금을 모집하는 등 육영사업에 전념하고 민중계몽운동에도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2
대통령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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