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元佑
1902-03-13 ~ 1938-02-24·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유원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920년 대구제일고등보통학교(大邱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재학당시 일제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의 주동 혐의로 대구경찰서에서 3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1927년 일본의 조도전(早稻田) 대학 정경학부 재학중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의 초대총무간사로서 동경에 유학중인 조헌영(趙憲泳)·전진한(錢鎭漢) 등과 함께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지하조직을 통한 항일운동의 선봉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동경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의 모임인 학우회(學友會)의 대표로 피선되어 일본 전국에 신간회를 조직하다가 동경시경시청에 붙잡혀 3개월간 구금되었다가 보석되었으나 요시찰인물이 되어 항상 일경의 미행감시를 받았다. 1930년 조도전(早稻田)대학의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였으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경찰국의 요시찰인물로서 행동의 제한을 받으며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5년 전진한·김한옥(金漢玉) 등과 함께 영남지구(嶺南地區)의 농민자금으로 우리나라 농민협동조합체의 효시인 상주군(尙州郡) 함창협동조합(咸昌協同組合)을 창립하여 책임지배인인 이사(理事)로서 농민수탈기관인 금융조합 및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맞서 농민의 권익보호와 농민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38년 안동농민회(安東農民會)의 주최로 농민계몽을 위한 강연을 하던 중 뇌출혈로 사망하여 군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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