兪鎭熙
1893-02-11 ~ 1949-08-31·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유진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1921년 3월 13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정기총회에서 대표 61인중 한명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고 6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서 해부학(解剖學) 실험용 두개골(頭蓋骨)이 분실되었을 때 일인 교수 구보무(久保武)가 조선인 학생에게만 혐의(嫌疑)를 씌우고 민족성을 모욕한 망언(妄言)을 규탄하기 위하여 학생들이 맹휴(盟休)를 단행하자 학생측과 학교측의 분규(紛糾)를 수습하기 위한 동창회 조선인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타결하여 등교를 실현시켰다. 1922년 11월 25일 '새생활' 잡지사 기자로서 로서아혁명(露西亞革命) 5주년 기념기사와 자유노동조합취지서(自由勞動組合趣旨書)를 인쇄 배부한 것이 필화(筆禍)가 되어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4월에는 김재봉(金在鳳)·김 찬(金燦) 등과 활동하였으며 1927년 2월 15일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표방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대표기관으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고 일제(日帝)의 식민지정책 타도와 총독정치 배격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92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