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業伊
(1868)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윤업이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봉화 출신으로 정경태의진(鄭敬泰義陣)에 소속되어 봉화(奉化)·순흥(順興)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정경태는 강원도 춘천(春川) 출신으로 1907년 음 7월 23일부터 성익현의진(成益賢義陣)의 도총장(都總將)과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강원도 울진(蔚珍)·평해(平海)·삼척(三陟)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음 9월 12일 성익현의진이 이강년의진(李康年義陣)과 제휴함에 따라 정경태는 이강년의 예하 부대장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동년 5월 이강년의진이 강원도를 거쳐 경북 봉화 지역으로 진출하자 성익현과 정경태는 이강년을 비롯한 예하 부대장들과 함께 봉화군 서벽리(西碧里)에 주둔하였다. 이리하여 이강년의진은 동년 5월 18일부터 전개된 서벽전투(西碧戰鬪)·내성전투(乃城戰鬪)·재산전투(才山戰鬪) 등을 치르며 대일 항전을 수행하였다. 1908년 6월 이후 성익현이 행방불명되자 정경태는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어 김상태(金相泰)와 함께 영주·풍기·순흥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1911년 6월 14일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김상태가 체포된 뒤 정경태도 곧 체포되었다. 관동창의대장 정경태가 1908년 6월 이후 1909년 6월 초까지 영주·풍기·순흥 지역에서 활동할 때, 윤업이는 1908년 10월 봉화주재소에 귀순하였다가 다시 1909년 1월부터 동년 5월까지 정경태의진에 소속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중 체포되었다. 1909년 10월 30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6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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