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昌萬
1896-08-15 ~ 1967-01-21·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尹昌浩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윤창만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안북도 의주(義州) 사람이다. 1919년 2월 8일에 일본 동경(東京)에 있는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학생의 신분으로서 청년독립단 대표들과 함께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같은 해 4월에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산하 조선청년단(朝鮮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7월에는 임시정부 만주(滿洲)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각지에 돌아다니면서 항일운동을 위한 강연과 임시정부 정치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활동하였고 청년단 신문을 발행하는 등, 남만주(南滿洲) 일대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안동찬(安東瓚)·선우 혁(鮮于爀)·주현칙(朱賢則) 등과 한·중 합작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중국 각계에 "중화민국 관상보학계 제군에 고함(中華民國 官商報學界 諸君에 告함)"이라는 항일성명서를 작성, 동지들과 연명으로 독립신문에 발표하여 중국 각지에 배포하였다. 1923년 10월경에는 상해로 돌아가서 청년단원에게 항일강연을 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22년부터 1925년 사이에는 항일운동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중국 하문대학(廈門大學) 교수가 되어 중국 학생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시키고 다시금 마래반도(馬來半島)로 가서 화교학교(華僑學校)의 교장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7년 6월부터는 산서군정치공작대(山西軍政治工作隊)에서 중국 산서군(山西軍) 소장(少將)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활동하다가 조국이 광복됨에 따라 귀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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