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昌哲
(1893) ~ 1923-10-12·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윤창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만주에서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재무부원으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대한통의부는 1922년 8월 준정부적인 성격을 지닌 독립운동단체로 조직되었으며, 한인사회의 자치행정(自治行政)과 항일무장투쟁에 주력하였다. 총장에는 김동삼(金東三)이 선출되었고 부총장은 채상덕(蔡相悳)이 되었다. 비서과장 고할신(高轄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교통부장 오동진,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이 활동하였다. 지방 행정은 각 현에 총감(總監) 사무소를 설치하고 총감 이하 임원을 두었다. 한인자치를 위해서는 각 지역별로 총관소(總管所)를 설치하였는데, 1922년 말~1923년 초에 개최된 통의부 제1회 중앙의회에서는 각 지역에 총 16개의 총관소를 두기로 했으며, 총감(總監)은 1,000호(戶)의 장(長)으로 하고 담당구역을 4~5개로 나누었다. 총관소에는 총감 이하 구장(區長),참사(參事),서기(書記),검무감(檢務監),검무원(檢務員),통신원(通信員)을 각 1명씩 두었다. 통의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광정단(匡正團) 등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꾸준히 연계하며 공동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면서 상당수가 이에 흡수되었다. 윤창철은 1920년 11월 대한독립청년단원(大韓獨立靑年團員)으로 평남(平南) 개천(价川)및 순천군(順川郡)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었다. 1922년 관전현(寬甸縣)에서 남만주통일후원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통일을 위한 선포문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 9월 중국 환인현(桓仁縣)에서 개최된 통의부(統義府) 회의에서 재무부원(財務部員)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0월 독립단(獨立團) 군정서원(軍政署員)과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1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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