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學照
1895-09-14 ~ 미상·일제강점기
이명·자·호 尹學祚, 尹東燮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윤학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1일 경성부(京城府) 종로통(鍾路通) 파고다(塔骨) 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3월 23일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 공산면(公山面) 동화사(桐華寺)에서 지방학림 학생들에게 만세운동 실행을 권유했다. 3월 1일 윤학조는 불교 중앙학림 학생들과 함께 경성부 종로통 파고다공원으로 향하여 이곳에 운집한 학생, 군중들과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시위 군중과 공원을 나와 서울 시내 각처를 활보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眞仁洞)으로 내려가 3월 23일 도학동(道鶴洞) 동화사(桐華寺)로 갔다. 그는 부속 지방학림 학생 권청학(權淸學)・김임도(金任道) 등에게 “경성, 그 밖의 각 지방에서 야소교 및 천도교 신자, 각 학교 생도들이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권유했다. 또한 만세운동은 “공산면 백안(百安) 시장에서는 효과가 적으니 대구부(大邱府) 덕산정(德山町) 동문(東門) 시장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3월 29일 학생 이성근(李成根)・김문옥(金文玉)・김윤섭(金潤燮) 등 9명이 깃대와 종이로 만든 구한국 수기(手旗)를 제작하고 동화사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덕산정의 동화사출장소로 가서 1박하며 다시 옷감으로 구한국기 1기(旗)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30일 오후 2시경 덕산정 시장에서 깃발을 흔들며 ‘구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윤학조는 만세운동 주도와 권유로 대구헌병대 헌병에 체포되어 대구헌병분대에 1919년 4월 30일 구류되었다. 같은 해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을 선고받고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7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5일 대구감옥에서 출옥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칙령(勅令) 제120호에 의해 징역 7월 15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20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