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康裕
미상 ~ 1907-09-06·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강유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이강유는 경북 문경(聞慶) 출신으로 1907년 9월 문경에서 일본군의 동향을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에 서면으로 통지하고 군수품의 조달과 의병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강년은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유인석의진(柳麟錫義陣)에 참가하여 유격장(遊擊將)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3월 재봉기하여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8월 한국 군대의 해산 이후 제천으로 들어가 민긍호부대(閔肯鎬部隊)와 합류하여 의병진을 재편성하였고, 8월 19일 주천으로 이동하여 40여 의병진의 추대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었다. 8월 23일 충주성 공략에 실패한 이강년은 단양,풍기 등을 거쳐 9월 7일부터 9월 14일까지 문경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동년 5월 강원도를 거쳐 경북 봉화 지역으로 진출한 이강년은 동년 5월 18일부터 전개된 서벽전투(西碧戰鬪),내성전투(乃城戰鬪),재산전투(才山戰鬪) 등을 치루며 대일항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 청풍 작성전투(鵲城戰鬪)에서 체포된 이강년은 평리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 12일(음 9. 19)일 순국하였다. 이강유는 1907년 9월 7일부터 9월 14일까지 문경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강년의진을 후원하였다. 이강유는 이강년과 서면을 교환하며 일본군의 행동을 통지하고 양식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강유는 1907년 9월 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심문을 받던 중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11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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