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建奭
1852-11-25 ~ 1906-05-10·조선
이명·자·호 李漢卿, 李源弼, (號)醒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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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건석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금릉(金陵) 사람이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앞세우고 이에 동조하는 오적(五賊 : 李完用·朴齊純·李址鎔·李根澤·權重顯)과 더불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다. 나라의 외교권(外交權)과 행정권(行政權)을 박탈당하는 내용의 조약늑결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 안은 일제와 오적신을 규탄하고 조약의 부당함에 항의하는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 중에도 평소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학문(儒敎學問)에 종사하여 온 유림(儒林)들의 분노와 울분은 대단하였다. 또한 정부 내에 있던 문인 관리들은 망국조약이 있을 수 없는 망극한 일이라는 것과 적신(賊臣)들의 불법하고 불의(不義)한 사실을 들어 광무황제에게 상소하여 적신들의 처단과 조약의 취소를 청원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소식을 듣고 전에 승지(承旨)로 있던 이석종(李奭鍾) 등과 함께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이어서 조약의 부당함과 적신들의 처단을 조직적으로 상소하기 위하여 13도소청(十三道疏廳)을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서 유생(儒生)들은 일제와 매국노들의 온갖 방해와 협박을 무릅쓰고 연명으로 광무황제에게 조약의 폐기와 반역자들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고 그들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상소에 대해 의롭지 못한 만행으로 대처하여, 상소항쟁을 거듭하던 그를 비롯한 많은 애국자들을 회유하고 또 한편으로는 협박하여 기세를 꺾으려 온갖 책동을 다 부렸다. 그는 일본군 파견사령부에 감금되어 한편으로는 일제(日帝)의 협박과 회유에도 결코 굽히지 않고 소신을 지켰다. 그의 절의(節義)는 몇 차례의 토혈(吐血)에도 굳게 이어졌으나, 결국 1906년 5월 10일 옥중에서 피를 토하며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그의 대쪽과 같은 절의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그가 순국한 후 버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들에게 쓴 다음과 같은 요지의 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아아! 사람이 그 누가 죽지 않겠는가마는 죽고자 하는 곳에서 죽기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죽어도 눈을 차마 감지 못할 일이다. 아아 응수(應洙)야! 너는 이 애비의 죽음을 애통해 하지 말고, 네 애비가 매국노를 주살(誅殺)하지 못하고 죽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하며, 네 애비가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애통해 해라. 지금 피를 토하고 죽음에 있어 몇자로 너와의 이별에 대하고자 한다. 내가 죽은 후에 너는 슬퍼함으로써 효도를 하지 말 것이며,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지 말고, 마땅히 내 뜻을 이어야만이 내 자식이 됨을 명심하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3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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