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基明
1898-02-27 ~ 1945-05-17·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기명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8일 경북 대구 시내의 만세시위는 대구 남성정(南城町) 장로파 예수교회 목사인 이만집(李萬集)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3월 8일 오후 3시경, 시위군중들이 대구시장에 모이자 이만집은 군중들에게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시기인데 각자가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독립을 위해 당연한 일이므로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고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기명은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으로서 이 학교 교사 및 다수의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에 동참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가 시위참가자들을 일제 검거할 때 그는 몸을 피하여 체포를 면하였으나,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을 통하여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몸을 피한 그는 3월 중순 이후 김수길(金壽吉)이 하숙하고 있는 대구부 신정(新町) 김석진(金石鎭)의 집에서 여러 차례 동지들과 만나 협의한 끝에 조선인 관리의 사퇴를 촉구하는 문서를 발송하고, 또한 우리 상인들이 일본인과 거래를 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문서를 인쇄하여 발송하기로 하였다. 그는 4월 2일경, 동지들과 함께 남산정(南山町) 박준이(朴俊伊)의 집에서「동정표시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제1호라는 제목으로 우리 상인들에게 상점을 폐쇄하고 일본인과 상거래를 중지하도록 권고하는 문서를 기초하여 이영식(李永植)이 가지고 있던 등사판을 이용하여 3백여 매의 경고문을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어 4월 3일경에는 김석진의 집에서 상점 폐점을 종용하는 문서 2통을 작성하여 포목상을 운영하는 김응수(金應壽)와 김경부(金敬夫)의 집으로 우송하였다. 그는 4월 중순경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이명건(李命鍵) 등 동지들과 함께 4월 17일 봉산정(鳳山町) 한세동(韓世東)의 집에서 혜성단(慧星團)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혜성단 본부를 대구에 두고 서울과 만주 등지에 지부를 두고자 계획하였다. 그는 혜성단에서 인쇄물 출판과 배포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5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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