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沂
(1848) ~ (1909)·조선
이명·자·호 李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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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보훈 드림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하여서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애국계몽단체(愛國啓蒙團體)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7년 2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을 처단하기 위해서 폭발장치를 한 선물상자로 위장하여 박제순(朴齊純)과 이지용(李址鎔)에게 우송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오적신(五賊臣) 모두를 한꺼번에 처단하기로 하고 나인영·오기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이 자신회는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 40여명의 청년들이 가입하였고 많은 애국지사들의 협조가 있었다. 1907년 3월 25일 아침, 그는 동지들과 각기 지정한 장소에서 박제순·권중현 등을 처단하기 위해 대기하였으나 상호 연락미비와 계획차질로 단지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동지들은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1907년 당시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의 판결에서 7년 유배형(流配刑)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珍島)에 귀양갔다가 얼마후 풀려났다. 그는 그후에도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8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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