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南彩
1899-05-06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남채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이남채는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주 지방에는 개화기에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어 금동교회(錦洞敎會)가 설립되고 1908년 숭일(崇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뒤이어 수피아(須彼亞)여학교, 제중의원(濟衆醫院) 등 교육·사회기관도 시설되어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러한 신문화의 영향으로 서울 및 일본 등지의 유학생들도 많이 생겼고 이들을 통해 세계정세와 독립운동의 움직임도 일찍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서울 봉래정 신행여관 에 머물던, 전남 나주군 나주면 출신의 김복현(金福鉉)은 독립선언서 수천매를 전남에 배포하기로 하고 3월 6일에 광주로 내려왔다. 김복현은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김강(金岡)과 상의하여, 3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한편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을 기회로 서울에 올라갔던 기독교인 김철(金喆)과 서울 유학생 최정 두(崔正斗) 등도 3월 5일에 광주로 돌아옴과 함께 지체없이 운동 계획을 시작하 였다.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는 약 1,000명의 인파 가 몰려들었다. 숭일·수피아 학교 학생들이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군 중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위행렬은 읍내를 돌고 돌아 저녁 때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였다. 경찰과 기마 헌병이 길을 막고 지도자들을 붙잡기 시작하자 군중들은 경찰서 앞마당으로 밀려들어갔고, 경찰은 구타와 폭행을 자 행하였다.시위 후 체포된 이남채는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항고하였으나,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2
건국포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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