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能權
(1864) ~ 1909-12-02·조선
이명·자·호 李能漢, 李能坤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능권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기도 강화(江華) 출신이다. 1905년 구한국군(舊韓國軍) 육군장교로서 고종황제의 밀서(密書)를 가지고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가하는 이 준(李儁)열사의 일행을 호위하여 일본군 수비대의 철통같은 감시망을 돌파해서 일행을 국외로 호송(護送)하는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해산령이 내려지자 해산 당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의 군인 50여 명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었으며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의병진을 인솔하고 강화도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에 걸쳐 접전하여 적군 다수를 살상(殺傷)시키는 등 혁혁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1908년에 의병부대를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이라 명명하고 부하 의병인 이호춘(李浩春)·유성준(兪成俊)·김추옥(金秋玉) 및 여만복(呂萬卜) 등과 더불어 강화군 길상면(吉祥面)에 살고 있는 방의표(方宜杓)란 자에게 군자금으로 엽전(葉錢) ,500냥을 조달 받은 이외에 11개소에서 약 43,800냥에 달하는 많은 양의 군자금을 조달한 바 있다. 또한 강화도 전등사(傳燈寺)에 몰래 숨겨 둔 무기를 일본군에게 넘겨준 송계찬(宋戒燦)이란 자를 살해하여 이적(利敵) 행위자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이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당한 이능권은 1909년 9월 27일에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소위 강도 및 모살죄(謀殺罪)로 교수형이 확정되어 동년 12월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80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