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彬
미상 ~ (1920-10)·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동빈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3월 13일 중국 용정(龍井)에서 북간도 최대 규모의 3·1운동 집회라 할 수 있는 '조선독립축하회(朝鮮獨立祝賀會)'가 개최되었다. 이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북간도 각 지방대표들은 '3·13운동' 직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결성하였는데, 조선독립기성회의 주요 인맥은 1910년대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간민회(墾民會) 활동을 통해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민족주의교육,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추대하기로 하면서 회의 명칭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하고 대한국민회 규칙에 "임시정부 법령 범위 내에서 독립사업 완성을 기도함을 목적"한다고 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북간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백히 선언하였다. 대한국민회는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에 본부를 두고 8개 지방회와 지방회 산하 130여개 지회를 두어 북간도 전역의 한인사회의 자치와 독립군 편성, 군자금 모집 등 폭넓은 항일운동을 추진하였다. 1919년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대한국민회 제일중부지방회(第一中部地方會)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노령(露領)에서 이범윤(李範允) 등이 조직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산하 대한의군전위대(大韓義軍前衛隊)에서 재무부장을 역임한 김종헌(金鍾憲)이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김승운(金承雲) 등과 함께 중국 왕청현(汪淸縣) 방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자가(局子街)에서 일본영사분관(日本領事分館) 순사 이기홍(李基鴻)을 처단하였다. 그후 1920년 10월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 발생하여 일본군 토벌대가 중국내 한인촌을 습격하고 한인들을 학살하자, 동 소식을 접한 그는 일본군 토벌대를 피해 연길현 장암동(獐巖洞) 부근에 잠복하였으나, 동월 30일 일본군 보병 제15연대가 이른바 '장암촌소탕작전'을 전개할 때 대한국민회 간부 최설(崔卨)·양도헌(梁道憲) 등과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2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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