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得洙
1899-04-14 ~ 1968-02-09·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竹水, 李相郁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득수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강동(江東) 사람이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1920년 8월에는 이환욱(李桓郁)·이치모(李致模) 등 십여명의 동지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臨時政府)에 군자금을 조달할 것을 목적으로 주로 20대의 농민·광부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농민단(農民團)을 조직하였다. 동단은 군자금 모집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일제 경찰관서를 폭파하여 한국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로 하고, 그 첫 계획으로 동년 9월 18일 그를 비롯한 이치모·이석돈(李錫敦)·최인택(崔仁澤)·박제현(朴濟鉉) 등이 강동경찰서에 다이나마이트 폭탄을 투척하였다. 또한 강동군내 원탄(元灘)·고천(高泉)의 경찰관 주재소도 폭파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화약의 준비가 뜻과 같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들은 이후 원래의 계획대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여 그는 9월 30일 이근배(李根培)·최인택·서달선(徐達善)·최선식(崔善植) 등과 함께 강동군의 부호 이관식(李寬植)으로부터 군자금 142원을 모금하고 10월 9일에는 동군의 서상목(徐相穆)에게서 군자금 100원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의 자금모집에 힘썼다. 또한 이들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입수하여 각 가정에 배포, 독립정신의 함양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활동 중 그는 동년 10월 12일 일경에 붙잡혀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3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그후 1924∼1927년 동아일보 강동지국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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