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冕奎
1886-08-25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면규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2월 28일 서울에서 박희도 등이 보내온 「독립선언서」 300장과 서신이 해주읍 남본정 기독교회 오현경 목사에게 전달되었다. 오현경은 교인들과 함께 고종에 대한 봉도식과 함께 선언서 봉독식을 거행하고 선언서를 배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남본정 예배당에는 기독교인 180여 명이 모여 고종 봉도식과 선언서 봉독식을 마치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4월에도 해주에서는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4월 3일에는 가좌면 취야리 취야장터에서 오후 2시경 6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를 행진하였다. 시위 대열은 곧 5,000명으로 불어났고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향하였다. 일부 청년들이 주재소에 들어가 전화선을 끊고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일제히 시위 군중을 향하여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시위 대열은 흩어지고 57명이 검거되었다. 8일에는 또 이목주재소 부근 주민 약 300명이 주재소로 몰려가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면규는 1919년 4월 태극기 등을 만들어 이목시장에서 시위 군중들과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심과 2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은 그는 “우리 조선은 빛나는 반만년 역사가 있는 제국으로 문화의 발달은 중국에 떨어지지 않았으나 하루 아침에 탐관오리의 천정(擅政)으로 병합이 이루어진 이후 항상 불평의 사상을 갖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바라고 있었는데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약소국에 독립을 허용한다 하여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을 시행하게 되었다. 조선민족으로서 태극기 등을 만들고 이목시장에서 동포와 함께 축하의 만세를 호창(呼唱)한 것을 1, 2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였으니 이는 부당하다”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다. 하지만 1919년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6월 20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7
애족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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