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冕雨
1889-01-09 ~ 1968-07-13·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면우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경북 상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곳 상주군에서는 상주읍을 비롯하여 화북면(化北面) 문장산(文藏山)과 운흥리(雲興里), 이안면(利安面) 소암리(小岩里) 등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상주읍 시위는 서울 중동학교 학생인 한암회(韓岩回) 등 학생층을 중심으로 거사계획이 추진되어 상주읍 장날인 3월 23일 전개되었다. 한암회 등 주동학생들이 시장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장꾼들이 이에 가세함으로써 시위의 불꽃이 타올랐다. 일군 헌병들의 탄압으로 시위대가 일시 해산하였으나 같은 날 오후 성성인(成星仁)이 시장 입구의 누문(樓門) 계단에 올라 피끓는 연설로 군중을 격동시켜 다시 5백여 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8일에는 화북면 장암동의 구장인 이성범(李聖範) 등의 주도로 1백여 명의 군중이 문장산에 올라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상주군의 각처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이면우는 4월 13일 화서면(化西面) 신봉리(新鳳里)에서도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강병찬(姜炳贊) 등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다가 일경에 발각,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4월 26일 상주헌병분대의 즉결재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0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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