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甫
(1866) ~ 미상·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명보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의병장으로 평북 강계(江界), 함남 홍원(洪原)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그것은 1907년 7월「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명보는 이 같은 시기인 1908년 음력 4월 거병하여 의진을 편성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00여 명의 부하 의병들을 이끌고, 같은 해 7월 중순까지 평북 강계와 함남 홍원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는 함남 홍원군 일대의 촌락을 옮겨 다니면서 하원천면(下元川面)에서 의병자금을 수합하여 군비를 마련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같은 해 5월 30일 송상봉(宋相鳳) 의진과 연합하여 홍원군 대대곡(大垈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월 13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3월 30일 경성공소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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