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奉涉
미상 ~ 1922-12-15·조선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봉섭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이봉섭이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군사정부인 군정부(軍政府)가 동년 11월 17일 임시정부에 소속하는 단체로 개편되면서 그 이름을 개칭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운영되었다. 즉 최고지휘부인 독판부 아래에 무장활동을 담당하는 사령부·참모부·참모처 등을 두었으며, 이를 보조해주는 기관으로 정무청·내무사·법무사·재무사·학무사·군무사 등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들 각 부서는 독판(督辦) 이상룡, 정무총장 이탁, 내무사장 곽문(郭文),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등이 담당하였다. 이봉섭이 참여한 서로군정서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은 40대의 장년층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신민회(新民會)의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만주지역으로 정치적인 망명을 한 인물들이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조직 이후 출신인사들이 많은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치하고,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지역에 40여 간의 광대한 병사와 수만 평의 연병장을 부설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이봉섭은 의용군(義勇軍)과 벽동군서(碧潼郡署)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 의용군은 1914년 통화현에서 무장부대인 백서농장(白西農莊)을 운영하던 채찬(蔡燦)·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 후 채찬·장기초(張基礎) 등에 의하여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00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輯安縣)과 통화현(通化縣) 등지에 두었고, 국내진공작전과 친일파 제거 등을 주로 하였다. 이봉섭은 서로군정서 의용군 소속으로 1922년 12월 15일 소대장 현기전(玄基甸)의 명령에 따라 집안현(輯安縣) 옥석동(玉石洞) 사하문자구(沙河蚊子溝)에 출동하였다가 마적을 추격하여 오던 중국 산림대(山林隊)의 습격을 받아 우리는 한국혁명군이니 응사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들의 발포로 동지 현기전·김인홍(金仁弘)·김낙두(金洛斗)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95
애국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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