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石和
1868-06-18 ~ 1931-12-04·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석화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1919년 4월 3일 전북 남원군(南原郡) 덕과면(德果面) 신양리(新陽里)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덕과면장 이석기(李奭器)가 재종 이성기(李成器), 면직원 조동선(趙東先) 등과 4월 3일 기념식수일을 이용하여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며 추진되었다. 이석기는 관청에서 연례적으로 시행하는 식수행사이니 만큼 일제의 의심을 받지 않고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석기는 3월 31일 열린 구장회의 때 각 호에서 반드시 1명씩 신양리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으로 모일 것을 지시하는 한편, 인근 지역의 면장들에게 만세운동 참가 취지서를 공문에 넣어 보내고「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라는 격문 20여 매를 작성하였다. 4월 3일, 도화곡에는 800여 명의 주민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나무를 심은 뒤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식사 자리에는 헌병주재소장과 보조원들도 초대되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석기는 군중들에게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여 일동의 동의를 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이석화는 조동선·이풍기(李豊基)·이승순(李承珣)·복봉순(卜鳳淳)·강응화(姜應化)·김택두(金澤斗) 등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현장에 있던 헌병들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군중의 기세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어 그는 이석기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남원-전주간 큰 도로로 행진하였으며, 기매면(己梅面) 오신리(梧新里)에 있는 헌병주재소에 당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남원에서 일본군이 출동하여 시위군중과 대치하여 형세가 험악해지자, 그는 자신이 주동자라며 스스로 주재소에 남고 나머지 주민들은 귀가하도록 하였다. 그는 1919년 6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05
대통령표창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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