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成九
(1897-10) ~ (1934)·일제강점기
이명·자·호 李秀峰, 李東儂, 金東儂, 李守福, 李守鳳
독립유공자 예우에 함께하기
국가보훈부가 운영하는 ‘모두의 보훈 드림’에서 보훈기금에 기부할 수 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복지 사업에 쓰이며, 이성구 님이나 그 후손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모두의 보훈 드림평안북도 선천(宣川)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향리 선천(宣川)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친일파인 선천군 태산면장(台山面長) 김병탁(金炳鐸)을 총살한 의거에 연루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신병으로 4년만에 가출옥하였다. 그는 가출옥과 동시에 해외 망명을 결심, 중국 상해(上海)로 갔다. 여기서 무장항쟁을 투쟁방법으로 삼고 1925년에 2번에 걸쳐 상해소재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져 폭파를 기도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1926년 1월 그는 결사동지 박창세(朴昌世) 문일민(文一民) 강창제(姜昌濟) 이운환(李雲煥) 등과 같이 무장항쟁을 위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 박창세를 단장으로 추대하고 그 자신은 대원이 되어 강력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경호를 위한 외곽단체로 크게 기여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특무공작도 겸하여, 일제의 앞잡이 밀정공산도배, 변절자를 숙청 처단하였는데, 그는 석현구(石鉉九) 유인발(柳寅發) 등을 암살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1929년 1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6회 이사회에서 신회원으로 입회허가를 받고, 특별회원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 5월에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도 활약하였다. 1931년 7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에서는 교민(僑民)의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를 조직하고 국민정부와 기타 중국 측 중요단체에 대해서 성명서를 발표하여 항일투쟁을 위한 한 중 양국민의 공동대처 방안을 도모하였는데, 그는 흥사단장 안창호, 애국부인회장 오의순(吳義橓), 소년척후대장(少年斥候隊長) 박창세(朴昌世), 야소교회 목사 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병인의용대장(丙寅義勇隊長)의 자격으로 이에 서명하였다. 또한 1932년에는 송병조(宋秉祚)·박창세(朴昌世) 등의 지시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년 11월에는 중국측 항일제단체 대표자와 회합하여 중한민중토일동맹(中韓民衆討日同盟)을 조직하고, 그는 특무부 부부장(特務部副部長) 이춘산(李春山)과 함께 격렬한 항일투쟁에 임하였다. 또한 동년 가을에는 한국독립당 송병조, 박창세의 지도로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는데, 이 한족회는 1934년 12월에 김두봉(金枓奉)·신광제(辛光濟)에 의하여 남경한족회(南京韓族會)로 발전하였다. 1933년 1월에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이유필(李裕弼)·강창제(姜昌濟)·김동우(金東宇)·안경근(安敬根)·문일민(文一民)·차이석(車利錫)·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당간부로 이 대회에 참석하여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 프랑스조계(租界) 하비로(霞飛路)의 백제약방(百濟藥房)에서 옥성빈(玉成彬)과 만나기로 약속한 그는 약속장소에 도착하였으나, 잠복하고 있던 일영사관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신의주로 압송된 그는 1934년 3월 1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8
독립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 포상
본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인물의 본관을 직접 기재한 기록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